성실한 악惡을 보다가

어떤 자는 온라인 담 안에 쓴 내 글이 길어서 읽기 편하지 않다 했다. 또다른 사람은 왜 짧은 글을 자주 쓰게 됐냐고 궁금해 했다. 오래된 담은 자연스레 허물어진다. 마음에는 쉽게 홍수가 나서 그 어미語尾와 본의本意를 슬어 갔다. 어차피 둬도 쓰지 못할 것이란 차라리 흩뿌리는 게 나았다.

정답을 정해놓고 묻는 말이 참 나빴다. 그것은 부지런한 탈환이라기 보다 성실한 악惡이라 보였다. 그런 이야기를 하기 싫었고, 적고싶지 않았다. 누구를 위해 나는 생각해야 하는가. 내 생각의 길은 다섯 개 보기 중에 없다 하더라도 문장을 써야 하는 윗줄에 적힌 몇 개 글씨조차 마찬가지였다. 결국 죽는다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 뿐이라는 몇 개 명제 외 대개 칸은 욕심이나 불만 아니면 근면한 오汚였다.

물은 무작위로 움직였다. 사실 작위의 임의일까, 여전히 모르겠다. 신神이 있냐면, 그것은 오히려 명료한데 우리는 흐르듯 여기저기를 움직여 가면서 그게 아닌 양 쉽게도 말했다.

이제야 거울을 보니 오염된 얼굴의 사람이 있었다.

어떤

일주일 사이에 서울에서 전남, 경기, 강원을 다녀왔고 주 6일 근무를 2주째.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을 친구공개로 바꿀까 고민 중. 살은 빠지지는 않았고 유튜브 광고 의뢰는 거절했고, 진행 중인 민형사상 소송이나 언론중재위원회 조정은 없고, 매매할 집과 교제 중인 사람 또 나가야만 할 단체 모임같은 것도. 때로는 읽히기 쉬운 몇 문장짜리 꾸밈 형용의 말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들이 있고, 언론지상이나 사회관계망 또 입이 아닌 어떤 기록에도.

사람을 알아가면서, 사람을 모르게 되네. 어떤 사랑은 되려 시말이 침묵에 있지.

행복은 있다, 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