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는 옳고, 자유는 때마다 붕궤崩潰됐고 또 되는다. 하지만.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어떻게 가늠해야 하는가. 범인들은 자신의 선택으로 그것을 판단할 수 있다고 혹은 판단에 다가갈 수 있다고 알고 혹은 믿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때로 편협한 한 개인으로서 그것을 외부의 소음이나 파찰破擦로 생각했다.

어느 곳에서 태어난 아이를 어떻게 기를 것인가. 어떤 교육을 어떤 순서나 방식으로 주고, 어떤 선善과 악을, 상과 벌 또 자극을 줄 것인가는 유년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성년이 된 그가 다시 어떤 시대, 마케팅, 또 환경을 마주했는지 그 모든 게 선택 가능한 것인지 그것과 개인의 숙고 사이의 대화와 타협, 거부가 그를 쌓아간다는 생각인 게다.

그리하여 다시, 아무의 어떠한 평화는 옳은가. 누구라도 살아갈 권리가 있는가. 자유라는 무거운 두 자를 떼고라도 살고 또 살아가면서, 원하지 않는 자극을 벗어나 갈등 없는 일상을 자타로 영위할 수 있어야 하는가. 그게 모든 때가 아니라면 지금, 2020년대의 문명화된 국가, 얼마큼 가능한가.

그 권리를 얻기 위해 시대가 빚진 게 있다면, 혹은 후세를 위해 미리 지불해야 할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고통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너무나 평온한 시대를 살았다고 생각했다, 때로.

그리하여, 그렇게 깊고 교만스러운 말을 기워더하지 않더라도 평화는 옳다. 애써서 남을 해害하지 않더라도 난대로 살아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실은 당연하다고 생각되며 언급됐던 안일함을 떼어 내더라도 그렇다. 정신이 들어보니 태어나 있었고, 조금 세상을 익혔더니 참수되거나 폭침爆沈된다면 그보다 큰 고통이 무엇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없었다.

그러나 그런 평화를 부수지 않고 유지하거나 붕궤된 상황의 진동수를 가라앉히는 사사건건의 시간은 어디서 오는가. 태초에 신이 수일간 세상을 만들거나 ‘인류의 시간’이 도래한 몇만년 전까지 각 류類는 평화와 혼란을 진동했다.

붕궤崩潰됐던 일들, 역사적 사건, 을 떠올려 봤다. 반도인들의 생존과, 사고방식의 진화에 대해 헤아려 보았다. 막혀도 또 막아도, 뚫거나 내몰려도, 다시 한번 생각을 더하자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내 생장과 성숙 과정을 포함해, 끝끝내 버티며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낸 것은 대단한 일이나 그에 막힌 것들 또한 있을 터였다.

어떤 자유가 붕궤되는 것을 보면서, 인본적 관점의 무탈은 당연하거니와, 앞으로의 봉합이 궁금해졌다. 우리는 때로 무너지고 깨졌으나, 다시 쌓았고 또 붙였다.

진동하면서 죽어가는 것은 인류에게만 주어진 대단한 무엇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각자의 평화를 원하듯 남의 평화를 그렇게 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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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은 얼었다

후진할 때는 왜 반대편 거울을 봐야 할까. 세 개 거울을 훑는 내게 장이 말했다. 어느 쪽부터 불쑥 무엇이 들어올지 모르잖아, 무엇이라도. 내 편이 얼마큼 불쑥 튀어나와 있는지도. 우리 삶에 그 무엇이라도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게 있을까 싶다가, 다시 돌이켜보면 확인하더라도 그게 확인됐는지 어떻게 확정할 수 있냐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토록 공언公言은 사소해져서, 우리는 비뚤어진 이성관과 그릇된 육아관을 의심했다. 가끔 살아남았고 자주 위치에 부응했으나 결국 틀리지 않았는지 되뇌며 울어버리는, 시간은 실로 무서웠다. 통장에 쌓이는 것은 이자가 아니라 불안감의 무게였다.

장은 이제 우憂가 없냐 자주 안부를 줬다. 따뜻했으나 고맙지 않았다. 우리는 만들어졌고, 그것은 부서진다는 클리셰Cliché였다. 갈수록 삶은 가벼워질까. 나는 겁을 뱃속에 욱여넣고 다시 거울 세 개를 쓸어 보았다. 더이상 거기엔 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찮은 공간들이 여백을 메웠다.

내內에 열이 올르자 바람같은 게 소리를 지르며 지나갔다. 시야 끝에 시기를 잘못 읽은 목련이, 하얗게 질린 메그놀리아가 부들부들 떨면서 빠르게 멀어져갔다. 목련은 얼었다. 내가 보지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