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별 문구 환상곡:이름없는 우리들 중 ‘들’을 위하여

학교 앞엔 문방구가 박혀 있었다. 그게 코흘리개 어린이들이 다니는 골목이건, 대입에 지친 영혼들이 어깨를 구부리고 쓰러지듯 걷는 이면도로건, 직사각형 담이 있는 언덕 아래엔 문방구가 있었다. 어디로도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박혀 있던 게, 요새 쉽게 헐거워진다. 흔들거리다가 몇 개가 빠졌다. 고향 집 앞의 일이다.

샛별 문구는 오래된 친구처럼 담 하나 사이를 두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내려다보이는 언덕 아래, 국민에서 초등국민으로 이름이 바뀌는 사이 동안 학교와 우리 집 사이에 있었다. 이를테면 어린 꿈의 삼각 편대 한 조각 중 하나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에서 여기저기를 두 발로 다니다 보니 20년을 넘게 자리에 붙어있던 샛별 문구 간판이 떨어져 있었다. 거스러미를 떼어내듯 내려왔을까, 아니면 정말 못을 뽑을 기세로 뜯겨서 이름을 잃었을까. 알 길이 없었다. 월세 같은 것으로 자리를 내준다며 연락처라는 숫자 열 개만 붙어 있었다.

한때는 ‘달고나’를 팔았고, 또 ‘아폴로’도 팔았다. 위생과 관련한 식품 파동이 몇 번 지나가고 나서는 오락기를 여러 대 가져가 놓으면서 학원 가는 길의 방앗간 격 사랑방이 되는가 하면 뽑기 같은 것을 설치해서 백 원씩 뜯어가는 로또 명당이 되기도 했다.

어린 우리를 위해 무엇을 내주었냐면, 사실 그건 아니다. 누군가의 삶의 값, 시간의 그루터기, 그의 자녀의 영이나 육을 채울 노동의 가치라는 것을 그때도 알았다. 여서일곱시가 넘으면 “아주머니 들어가셔야 하니까 우리도 가자”고 했던 애들은 벌써 직장인이 됐거나 국가에서 일하고, 또 샛별 문구의 아주머니처럼 자영업자가 되기도 했다. 그 중 몇은 샛별보다 늦게 간판을 올렸다 더 빨리 떨구기도 했고, 다른 몇은 비슷한 양태의 업을 가지면서 개밥바라기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빨간색 글씨의 샛별과 파란색 글씨의 문구 간판 아래의 공간에서 나나 내 오랜, 지금은 혹 연락을 주고 받지 않더라도, 친구들에게 추억이었고, 역사였고 다시 희노애락의 여울이었다.

그땐 2층엔 가정집이 들어와 있었다. 샛별 문구 일가가 살다가 세를 줬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피아노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조금 더 먼 곳에 있던 한 문구 이 층엔 아예 피아노 학원이 있어서 고시원같이 빼곡한 방마다 연습용 건반이 가득 차 있었던 것과 달리 샛별 이 층에선 한 대의 피아노 소리만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요나 가요 같은 게 들려왔던 기억들이 머리 한 켠에 있는 것이다.

학교가 들어서면서 같이 지어졌다는 샛별 문구는 이제 새로 페인트칠을 해 아래는 회색빛의, 이층은 하얗고 또 연노랑의 건물이 됐다.

1층의 간유리를 들여다 보았다. 간판 없는 샛별 문구는 텅 비어서 안엔 사람도, 물건도 없었다. 다음 방문때는 아예 셔터가 땅바닥에 박혀 있었다. 건물을 통째로 넘긴 걸까. 2층 역시 완전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돼 있었다. 건물엔 입도 발도 없지만 혹시나 하고 벽에 귀를 대 보았다. 품은 사람도 없는 듯 샛별 문구는, 또 샛별 문구의 얼굴들은 말이 없었다.

어떤 일을 오래 하다보니 지명은 사건으로 기억되곤 했다. 이를테면 강남역은 진흥상가 화재, 은평구는 은명초등학교 화재, 신논현역은 노래방 화장실 살인, 국회 앞 여의도는 택시 기사의 분신 사망, 서울숲도 임금체불에 의한 자살 소동, 양재동은 택배사 중간 분류지 르포르타주, 양천구 목동은 16개월 아동의 학대 사망, 송파는 문화계 블랙리스트나 장자연씨 사망과 관련한 윤지오씨 등일 것이다.

서울을 벗어나도 그건 때때로 작용한다. 안산 고잔역은 세월호 단원고등학교, 이천은 물류창고 화재, 철원은 수해 복구, 속초나 고성은 산불, 파주는 드루킹과 김경수 경남 도지사의 사건, 포천은 아시아 최대규모 미군사격장 주민 피탄 문제, 동두천은 미군 캠프 이전과 경제개발 문제.

마음이 편안하면서 좋았던 기억은 평창에서 대규모 행사가 열렸을 때 강릉을 오가면서 했던 것 정도에 머무는 듯 하다.

양평은 데이트 코스, 가평이나 하남, 수원, 광명, 천안, 아산, 세종, 춘천도 사랑만 가득할까. 앞으론 그게 가능할까. 알 길 없다.

샛별을 위한 서사에 내 삶을 얹는 것은 때로 내가 겪는 환상통같은 고충이, 지명의 피동(被動)이 겪고 있을 것과 다르지 않냐는 단단하지 못한 심경 때문일 것이다.

사건은 글로 쓰이고 덮이고 지나가지만, 사람은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사는 것은 때로 ‘살아가는 것’으로 불리우지만 가는 곳에 곁에 끼워져 있는 것이 사망진단서라는 것 외에 우리는 어느 쪽으로 어떤 세기나 빠르기로 가고 있는지 쉽고 편하게 알지 못한다. 어떻게 가야 하는가. 이 비등가속(非等加速)의 길, 부모세대를 앞질러도 이상하지 않고, 빈부나 사상도 가늠하지 못하는 탄지(彈指)의 길을.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말에는 “변하지 않는 사랑은 흐르지 않는 물 같다”거나 “때와 상황에 따라 사랑은 세기와 형태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을 하는 이의 속삭임을 들어본 적 있었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겠지만, 내 삶의 샛별이 지는 것을 아직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샛별이 떠난 고향에서, 단어들을 주저리주저리 엮어봤다, 이게 회한(悔恨·뉘우치고 한탄함)이란 것일까. 아니면 샛별이 내게 준 데 대한 회한(回翰·회답하는 편지)일까. 어둠이 멀리서부터 내려오고 있다. 내려오고 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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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겨우내 자랄 수 있던 이유는 재능 때문이 아녔다. 그것은 포기였다. 쉽게 말해 닿을 수 없는 이상을 염두에 두는 게 아니라, 어떤 담이나 천장을 알거나 보지 못해서, 기어코 아닌 묵묵히 뚫고 가는, 그것은 포기였다.

그 엄두가 나지를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니, 있다. 어느 재개발 구역에 들어가 사실 누구에게 몇만 원씩 돌아가는지 모르는 십수만 원 깔세를 내고, 언덕에 어깨를 붙인 사람을 나는 본 적 있었다. 어떤 사람의 지옥이 또다른 이의 천국이나 연옥 사이쯤이 됐다가 결국 벽을 허물면서 뒤로 또 뒤로 밀려나는 벼랑을 나는 본 적 있다. 그 골목엔 다시 월급 몇십만 원짜리 사람이 의자를 깔고 앉아 있었다. ‘철거’ ‘개새끼들아’ ‘사람이 있다’를 써둔 골목 앞에서 “여기서 나가세요, 당장”을 외치는 사람 역시 집엘 가면 염치없게 어떤 사람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그는 다시 연옥를 나눠서 몇 단계쯤에서 상한가와 하한가 사이를 저울질 했다.

밀어내는 게 환상이 아니라 실제라는 것을, 못 느낀 이들은 절대 그것을 알지 못한다. 몇 년전 나는 벽이 좁아지는 꿈을 꿨다. 고향집 아파트가 부엌 분리형 원룸이 됐고, 부엌이 사라지면서 공동주택이 준주택으로 이름을 갈았으며, 설치된 가스레인지는 법령상 전기레인지(인덕션)으로 대체됐으며 결국엔 침대가 의자의 역을 대신 맡는 고시원으로 밀어졌다. 창문이 있는 방은 3만원이 비쌌지만, 사실 소용이 없는 것은 머리 위에 설치된 간이 옷걸이 기구, 이른바 ‘행거'(행어)가 빛을 차단하는 암막 역할을 함께 했기 때문에.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어떤 기차역이나 전철 사이 마련된 깔개 위까지 또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쉽게 생각되지 않았다. 때로 그걸 알지 못해서 울었으나, 나의 연옥은 어디쯤에서 샛길이 날까 하는 고민 또한 깊어졌다. 왼쪽 눈에서 눈물이 맺히면 오른쪽 것은 건조증을 앓았다. 아팠다. 앓으면서 버틴다는 것은 편한 일이다. 육하원칙에 따라 스스로를 설명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어렵고 때로 곤란한 일이기 때문이다.

팔 것을 찾아야 했다. 교환이야말로 유일한, 또 감사한 그리고 거룩한 행위다. 밭을 갈지 못하는 사람은 그림을 그렸고, 사냥을 하는 이는 소금이 필요했다. 시장과 은행이 진화하는 동안 나는 무얼했나. 겨우 단어를 모았다. 겁이 많아져 설까, 귀가 커졌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 화가 많은 듯 편두통에 시달렸다. 어느 1980년대 봄에서부터 2010년대까지의 일이다. 묵묵히 재능을 길러갔다. 그것은 포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