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마지막이네요. 뒤에 있는 줄은 다음 게이트인 에어프랑스 타는 줄이거든요. 혹시 섞일까 봐 직원들이 소리 지르고 다녔어요.”
10시 40분 비행기인 줄 알고 느긋하게 줄에 서서 제주도에 사는 가수의 노래를 듣다가 큰일 날 뻔한 오전, 눈 떠보니 나는 어느새 ‘호수의 땅’ 수오미에 있다. 중국 텐진과 베이징, 몽골 울란바토르와 바이칼호를 낀 러시아 이르쿠츠크, 북극해가 코앞인 노비우렌고이, 백해와 마주한 라르한겔스트를 지나 발트해. 백림까지는 앞으로 한 시간. 다시 독일을 찾기까지 11년이 걸렸다.
2007년, 백림의 추억은 거기에 살고 있다. 따뜻해져서, 호기 있게 사랑이나 하고 있던 나는 친구 A, 선배 B와 함께 호기롭게 부산 금정구 장전동의 한 여행사를 찾아 숙소와 비행편을 예약했다. 수학능력검정시험 ‘물이 덜 빠져’있던 나는 사실 구라파에 대한 동경을 달리 품지 않았다. 지구가 작아져서, 이제 집에서도 책이나 영화, 온라인으로 구라파에 대해 ‘그렇게 찬란하다는 문명의 젖줄’에 대해서 알 수 있다며 냉소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
오히려 걱정은 돈이었다. 엄마의, 사실 아빠의 돈과 내 노동사입의 날을 빌어 한 달을 보내는데, 10년이 지나 지금 내가 벌고 있는 돈으로도 감당 못할 소비에 천착해야 한다는 사실은 수능에 실패하고 학점조차 수렁에 빠진 나에게 부끄럽고 조심스러운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운이 좋았다면 좋았을까. 그해 나는 아르바이트로 ‘나름’ 돈을 열심히 벌었고, 동생과 두 살 터울인 탓에 그해에는 대학 등록금이 한 명치만 필요했다. 엄마와 아빠도 가본 적 없는 구라파다. 엄마는 감사하게도 내 통장에 돈을 넣어줬다.
그렇게 한 달 반을 집 떠난 삶을 살았다. 가장 사진 실력이 많이 늘었던 때 호기롭게 돌아다닌 섬과 대륙 곳곳은, 사실 그쯤 유행하던 이십 몇 개 나라 일주같은 유행의 코스 일부였지만 행복과 좌절은 곳곳 도처에 있었다. 한없이 평온함에 가까워지던 로마, 여전히 골목 하나까지 기억하는 니스, 공창을 처음 보고 놀랐다가 성욕이 전혀 생기지 않아 더 놀란 암스테르담.
백림은 중간에 있었다. 쾰른과 뮌헨, 때마침 지역 축제까지 겪으면서 “Original or Black”만 고르라면서 1ℓ들이 맥주잔을 권하던 아저씨들은 온갖 소매치기에 겁을 먹던 우리의 안정제가 돼줬고, 살찌는 소리가 들릴 지경일 때도 긴장과 함께 허리띠도 풀어버린 탓인지 우리는 소시지를 삼키고 마음을 먹었다.
첫 유럽 여행은, 그러나 웬일인지 나에게 회의감만 선물했다. 모나리자를 보고 에펠탑 앞에서 김동률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환상인지, 어떤 게 괜한 욕심이고 어떤 게 필요충분에 의한 것인지 고민이 깊었던 것이다.
그 생각은 관광을 수업으로 들으며 오히려 커졌다. 공항은 권력이고 항공과 노선은 정치였고 그렇게 생긴 부대 산업은 경제 그리고 이것들이 거미줄처럼 얽히면서 강력해지는 탓에 어떤 이는 고향의 고유한 것을 잃어버린다는 수업을 들으며, 한참 오랫동안 항공 노선을 뒤지기도 했다.
호기심, 사유가 인간을 여기까지 오게 했다지만, 질문에 대한 질문만 반복하던 나는 그후 한참이나 오랜 기간 여행을 피했다. 피했다기에는 너무 많은 곳을 다녔지만 특별한 장소에 대해서 특별한 기분을 느끼는 것을 의도적으로 삼가고 있었다. 굳이 어딘가를 다녀왔다며 자랑하듯 읊는 것도 마찬가지로.
여러 이유로 1년을 준비한 백림행이 좌절되게 생긴 적이 3번이나 된다. 마지막 비행기표를 취소할 때는 씁쓸한 기분마저 들었다. 사흘 밤낮을 고민하고 백림행을 선택하고서 빈 통장 잔고만큼은 아니겠지만 웃음이 났다. 다시 결국 필요충분 때문에 여행하게 되는 것일까. ‘그냥 가보고 싶은 곳’이란 여전히 없어서, 이번에는 조금 두근대면서 떠날 수 있을까 했지만, 여전히 아직은.
그래도 조금 기대 된다. 조금씩이라도 낭만을 되찾을 이유가 생긴 탓인지, 아니면 그리운 사람이 생각나서일지.
늑대 울음소리같은 브레이크 소음이 귀를 덮고 있다. 나는 지금 백림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