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사망에 대해 무덤덤해진지 오래다. 일 때문에 본 시체, 또 망자의 기록, 아니면 수없이 마주하는 안타깝거나 혹은 잔인한 죽음이 역치에 닿아서는 아니다. 사랑하던 선생님, 형 또 언론사 선배가 돌연 유명을 달리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세포의 재생 주기가 계속 짧아지면서 ‘회복의 끝’에 다다르는 게 무서워서도 아니다. 내 죽음도 그럴 것이다. 그저 살았으니 결국 숨을 놓는 것, 그 당연한 굴레를 거스르지 않겠다는 느낌 정도다. 열몇해 전 한 신부는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더니 ‘나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했다. 천국도 지옥도, 환생이나 구천도 마다하여서, 무덤덤하게 죽고 싶다. 믿음이 약한 죄로 이생 다음의 수만 시간 동안 불탄다면 그 업보도 이겠다는 마음이다. 그럼에도, 사실 종교와 별개로 나는 무신론자가 아니다, 여전히 무덤덤하게 죽고 싶다.
그런데도 주변이 늙어가는 것에 슬픔을 느낀다. 마음이 힘들 때면 외할머니께 전화를 걸곤 하는데, 그럴 때 더욱더 그러하다. 노화의 진행은 천연하게도 당연함에도 목소리에 힘이 약해지는 그에게 안타까움과 함께 내가 무엇을 해드릴 수 없음에 처절한 기분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어른이 되면서 ‘가족의 조연’이 된 뒤 자녀의 보물 혹은 업보를 다시 안아 기른 그 인생에 나는 한없이 미안해졌다가, 다시 값싼 안타까움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끝 맺을 수 없는 글에, 끝 맺을 수 없다는 말을 한 줄 더해 밀려오는 형언불가의 감정을 막아본다. 나는 ‘그거 아느냐’는 말이나 ‘무슨 말인지 알지요’ 같은 말이 싫어서 글줄을 입에 물었건만, 이따금 가슴에서 목 사이에서 턱 걸리는 단어나 울음, 감정에는 어찌할 바 모르다가 머리와 가슴에 열이 오르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