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 간 김에 외할아버지 계신 곳을 다녀왔다. 숙소와 왕복 10㎞이길래 전날 저녁 회합을 최대한 짧게 마치고 아침 일찍 일어나 냉큼 달려가 큰절을 두번 하고 왔다. 큰 비가 온 뒤라 걱정했지만 다행히 할아버지 계신 곳은 깨끗했다, 조금 축축했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외할아버지께서 대전에 가신 뒤 이제 겨우 4번째 방문. 횟수로 가깝고 멀고를 담을 수 없고, 여전히 외할아버지 모습이 눈에 선한데 나도 나이가 차서일지 아니면 그냥 감성바다에 누워 있어서인지 오래 전 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외할아버지는 한쪽 다리에 의족을 대고 사셨다. 전쟁에 다녀오신 뒤 그렇게 지내셨지만, 언제나 꿋꿋했다. 아빠는, 물론 그 전에 알았다 하더라도 중매결혼이라 결과는 바뀌지 않았겠지만, 엄마와 결혼하고 나서도 그 사실을 몰랐다고 했다.
그런 외할아버지는 항상 다리 운동을 열심히 하셨다. 허리 운동도 곧잘 하셨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짐을 나르고 무거운 것도 쉽게 드셨다. 엄마의 오남매를 그렇게 할아버지는 길렀다. 물론 이모들은 엄마가 고등학교에 업고 다니면서 기른 면도 없지 않지만.
외할아버지의 다른 기억은 아이러니하게도 ‘서울’이다. 서울이고 광주고 하는 대도시를 나는 외할아버지를 통해 알았다. 6살에서 9살때쯤의 이야기다.
여수는 촌이다. 요새야 관광도시로 탈바꿈하고 한국철도공사가 운영하는 고속철 종착역이 돼 유동인구도 늘었다지만 내 어린 시절 기억 여수는 여전히 비둘기호를 탈 수 있는 도시, 지금은 엑스포 공원으로 바뀐 옛 여수역 자리 주변에 사창가가 깔린 바닷마을, 싸움이 끊이지 않는 종포, 오래 전 밀수를 바탕으로 규모의 경제를 이루었다가 화학단지가 들어서면서 다시 커진 지역, 그 정도. 여전히 불이 캄캄하게 꺼진 상태에서 광주였던가 대전쯤에서 비둘기호를 타고 집을 가던 기억이 선한 오래된 여수.
외할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서울을 제일 많이 들락거린 사람이었다. 어떤 연유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서울을 다녀온 할아버지 손에는 항상 ‘서울 순대’가 들려 있었다. 집 앞 시장에도 순대를 팔았고, 오히려 더 싼 값에 많이 먹을 수 있었을 텐데 외할아버지가 그렇게 ‘서울 순대’를 사오시던 이유는 아빠가 집에 들고 오던 동키치킨과 비슷한 것일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내 첫 서울 기억은 순대였다. 초장이나 막장에 쩍어먹는 여수맛이 아닌 소금에 찍어 먹던 그 짜고 담백한 맛.
그 맛을 주신 분께서, 지금은 대전에 계신다. 자주 뵙지 못한다. 그래서 굳이 왔다, 달려서 갑동에.
이럴 때는 그래도 기억력이 좋은 사람인 것이 좋다가, 이것 역시 나만의 것은 아님을 생각한다. 나는 지금 얼마나 넓고 멀리 또 깊게 생각하고 보고 생을 끌고 가는가.
남은 5㎞를 뛰어 오면서 내내 이 생각뿐이었다. 가을은 오지 않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고요한 상태, 유성천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폭우에도 견뎌 준 양 둑을 사이로. 당신 같은 이 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