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한참이나 고향을 떠났던 준상이는 서른다섯살이 넘어서 귀향했다. 작은 죽 가게를 냈다. 성적도, 성격도, 돈이나 행복에 대해서도 전부 중간쯤 갔던 것으로 생각됐던 그의 팔엔, 정확히 말해서 상완과 하완 각각 한 곳씩 두 곳엔 굵직한 문신같은 흉터가 나 있었다. 팔을 접으면 이어지는 형태의 흔적. 죽을 사가던 누구도 큰 솥을 휘휘 젓느라 반팔 차림인 삼십대 중반의, 까맣게 탄 사내에게 연유를 묻지 않았다. 굳이 물을 필요도 사실 없었지. 적당한 거리가 미덕이 된 사회, 죽이 상하거나 맛이 없어서 언성을 높일 일이 아니면 팥이든 단호박이든 아니면 녹두나 미음의 이름만 구호하면 됐기 때문에.

용역 뛰었다, 덕현아. 너 그런 거 많이 봤을 거 아니냐. 집행이나 사람 끌어내는, 마음 불편해. 여전히 어려워.

이야기 모으는 내 일에 고해하듯 준상이가 입을 열었다. 머지 않은 곳에서 파도가 치고 있었고, 하지를 향하는 세월엔 거칠 게 없었다. 시간도 이렇게 끊임 없이 가고 또 몰아치지. 준상이는 팔의 상처에 대해서도 고해告解했다.

양희씨는 프랜차이즈 편의점이 싫었다. 값싼 메뉴들이 밀고 들어오는 게 괜히 더 불량한 식품, 저어한 것들이 괜히 자본의 힘인가 싶어 ‘돈 많은 것의 사업’을 싫어했다. 그는 호떡장사와 라면가게, 담배 판매를 겸한 구멍가게를 운영하면서 살아왔다. 17년, 그가 성미동成美洞에 산 21년 중 첫 2년과 아파서 쉰 2년을 제외한 기간 동안 밥벌이가 된 땅에 용역이 등장한 건 몇 달 전이다.

땅 주인은 건물주에게 그간 사실상 무상으로 쓴 값을 요구하지 않을테니 몇월 며칠까지 건물을 비우라 했다. 건물주는 관리인에게 몇 주의 말미를, 다시 삯을 내는 이들에게 작별을 요구했다. 하달되고 다시 분해됐다 조립된 말의 틈은 가시가 솟기 시작했다. 땅은 하늘이었고, 요청은 바늘이었다.

양희씨는 며칠간이나 끙끙 앓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방 한 칸, 그것도 문을 열면 바로 이면도로가 보이는 위치인데다 문 앞에 하수구 뚜껑이 있어 향긋하지 않은 냄새가 자주 코를 찔렀지만, 은 이름을 달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담배회사, 정확히 말해선 담배를 떼다가 성미동 같은 촌동네로 보급했던 도소매업자, 가 준 안내판엔 웃음이 예쁜 해가 그려져 있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양미씨는 그 광고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를테면 ‘담배를 피우고 행복하라’거나 ‘해처럼 강한 불꽃으로 스트레스를 태워버려라’는 건 몰랐지만 타오르는 해를 쫓아 담배를 사러오는 이들 때문에 그 광고를 좋아했다. 그러나 이젠 그것도 떼어내야 할 차례다.

방법이 없었다. 땅주인도 건물주도, 이들을 대신해 세를 받으러 오는 관리인도 어느새 사라지더니 앞엔 건장한 남성들이 가득찼다. 자세히 보니 몇 명은 여성이었다, 덩치가 건장한 남성만한. 양미씬 반항하거나 붉은 띠를 머리에 매지도 않았다. 가게 안 매대 위에 꼿꼿하게 허리를 세워 앉았다. 오늘은 돌아가줘요. 연락 드릴게요. 정리할 게 좀 있어요. 이러지들 맙시다.

묘기를 부리듯 몇 명이 양희씨를 끌어 안았다. 양희씨는 책상 다리를 부둥켜 안고 버텼다. 라면 선반이 부서지고 있었다. ‘담배’가 적힌 해가 날아갔고, 유리창도 깨졌다. 책상이, 벽에 20년 가량 박혀있던 게 뽑히면서 서까래가 주저 앉았다. 뒤에서 ‘악’ 소리가 났다. 누구 다친 거 아니에요? 잠깐 멈춰보세요. 이것 좀 놔 봐요. 양희씨가 외쳤지만 멈추는 이들은 없었다. 라면 냄비가 마당에 뒹굴었고, 플라스틱 의자는 부서져서 가루가 됐다.

준상이는 바닷일을 하고 싶어 했다. ‘모든 것을 무르고 오면 배를 타고 아무도 없는 망망대해로 나가 일만 하면서 살고 싶다’ 했다. 정식 선원이 되기 위해선 해양수산부에서 주는 자격증이 필요하단 걸 알고는 바닷가 옆에서 죽을 팔기 시작했다.

피가 마른다는 건 참으로 독한 말이다. 남의 피를 말린다는 건 더 그래. 눈빛은 삶을 담는다 했던가. 지독해진, 이따금 사백안이 되는 준상이는 때때로 이런 말을 남기면서 두 손으로 큰 주걱을 휘휘 돌렸다. 두 손을 모은 모습은 기도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성미동은 ‘아름다움이 완성된다’는 뜻의 동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떴고, 아름다움은 세월 속에 가라 앉았다. 집터를 다지는 굴삭기만 땅을 밟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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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감정을 위해서

이별을 위해서 사랑하는 걸 미안해하지 마세요. 알고 있었죠, 감정 타는 사람인 것을.

그런 걱정 정도로 삶을 판단할까요. 사람 무너지는 속도가 애끓는 것보다 빠를까요. 그렇다고 오해 말아요. 나도 끓는 점 낮지 않거든요. 아프지 않아서 아픈 티 내지 않는 게 아니 거든요.

계절을 불러야 낙엽 질까요. 벚꽃이 탈락하는 게 봄이 깊어진 걸 의미하나요. 모르죠. 다 살아보지 않았잖아요. 나를 모르잖아요. 내가 알려준 내가 난지 스스로 모르는데, 어떻게 당신 계절이 내 막간幕間을 갈라놓나요.

아시잖아요, 오롯이 사랑한 거. 모르잖아요, 숨고 싶은 거. 관심 없잖아요, 어느 틈이 막혀있다가 뚫렸고 다시 어느 길은 끊어졌고.

종교가 사분오열되는 동안 신神은 초연했고, 사랑이 뒤덮이다가 폭탄이 떨어지는 찰나에 우리 사이는 진공이 됐다가 알 수 없을 임의 방향으로 흩어지겠죠. 섣부른 걱정이란 요要하지 않으니 그저 그뿐일 테죠.

사막은 길었고, 당신은 물 마르는 길목에서 영생을 찾았죠. 그건 오해가 아니라 신앙 같은 거, 흔하게 오지 않는 운명의 감정선.

많은 두려움과 우려 속에서, 굳이 그 안에서 진주를 찾지 않더라도, 굳고 얼고 다시 녹는 게 마음이란 걸 우습게도, 쉽게 알았죠. 2시간만 얼굴 볼까요. 아니면 3시간만 감상에 젖어볼까요. 아니면 15분쯤 같이 걱정이나 할까요. 혹시 1초쯤 사랑 어때요. 그게 영원하면 난 어쩌죠, 다행히 시간이 갈라줄 게 많겠지만요.

사랑에서 미안한 것을 이별하지 말아요. 알고 있었죠, 사람 타는 감정이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