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거리를 품만큼 가까이 앉아본, 친구라는 이야기다, 사람은 알 것이다. 내가 꺼냈던 사슴 이야기를. 환란의 며칠이 살점에서 떨어진 날, 그 이야기를 심심하게 꺼내 보려고 한다.
초등학교 3학년 시절로 기억한다. 이후 최근까지 나는 같은 꿈을 연이어 꿨다. 다른 것도 많았으며, 더 많았을 테다. 우리는 사실 꿈을 자세히 묘사하지 못하니까. 그런데도 기억나는 몇 개 현상現像에는 돌연 성적 지향이 바뀐 이의 사랑이나 물에서 빠져나온 어류와 여행, 청소년기에 진했던 색정色情 혹은 순수의 시대처럼 복잡 다양같은 것들이다. 이 밖에도 노트 몇 권과 온라인의 몇 개 단락에는 그게 숨어있다. 오래된 같은 꿈 그것을 빼놓고서.
이걸 털어내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나 스스로 그 터널을 깨거나 왜곡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이 꿈은 마치 내 심장에 박힌 다이얼처럼 이따금 툭툭 튀어나와서 머릿속으로 들어갔다. 유통기한이 없는 줄 알았으나, 어른이 될 수록 그 빈도가 줄어드는 탓에 하염없이 붙잡고 싶어서일까. 이제는 1년에 대여섯번 꿀까 말까 한 피터팬의 유수流水 같아서 굳이 문자에 대고 얕은 심보로 청을 하는 것이다.
청록의 빛은 암흑부터 찬란까지 제멋대로 깔려있었고, 그 위에 사슴이 서 있었다. 뿔이 우람하고, 귀도 커다란 그는 본 적 없는 자세로 있었다. 마치 기도하는 듯한 작태, 무릎을 뒤로 꿇은 모습은 이후 보고 알게 된 사슴의 해부에 비해 해괴했다. 사람에게서 진화한 사슴의 모습이라면 저렇게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상상의 틈은 오래 허락되지 않았다. 사슴이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청록의 눈밭을 청록의 사슴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다. 사실 내 의지도 아니다. 사슴을 봤을 때 나는 이미 사슴 등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동물 학대가 아니냐고, 굳이 그런 지적할 필요는 없을 테다. 이건 꿈이니까. 눈 앞의 눈은 생크림 케이크처럼 갈라지면서, 무척 부드러운 하강 여행을 나는 그와 했다. 고요한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은 기분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내 꿈에는 소리가 쉽게 등장하지 않는 편이고, 이 꿈은 20년 가까이 그렇게 무음의 운명곡을 재생해왔다.
곧이어 깎아지를 듯한 이 언덕은 끝이 났다. 그러나 이건 종국을 향한 기착지일 뿐이지. 속도는 줄지 않고 그대로 나아간다. 어느덧 사슴은 없다. 사슴의 목과 뿔, 내가 하강을 할 때면 꼭 붙들던 그 녹각鹿角이 지워지며 나는 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나는 사슴에서 내린 것일까, 아니면 내가 사슴이 된 걸까. 말간 큰 눈이 느껴질만큼 예민했던 나는 청록에서 백설로 바뀐 배경을 뚫고 먼 점을 향해 나아가다가.
다시 새벽. 오래된 사슴이 없는 새벽에 빛을 바라보는 아침에 나는 등교와 졸업, 출근과 지필 속에서 사슴을 찾고 있다. 나였던, 나이기를 바랐고 나를 바랐던 내 사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