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년을 안팎에 둘 때쯤의 일이다. 전라도의 땅 끝에 살던 사람들이, 뭉쳤다가 다시 흩어졌다가 서울 한복판에 집합한 적 있다. 중구의 명동성당, 종교와 수사搜査가 부딪힌 선은 견고한 막이 생긴 것처럼 갈라섰고, 중간에는 신부도 모세משה도 없었지만 누구도 꿈쩍하지 않고 며칠을 버텼다. 미사Mass가 마비되고, 모세혈관은 팽창했던 선봉이 원하던 것은, 그렇게 시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들리는 단어들. 인권이나 임금, 협상이나 노동조합같은.
어떤 여성은 삼십 대에 그 투쟁 뒤에 있었다. 백양BYC과 트라이TRY같은 상표가 찍힌 위아래 백내의白內衣는 종로나 을지로에도 몇 장에 몇천 원에 팔았을 텐데, 그녀는 그것을 바리바리 싸서 서울로 갔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지키는 첨단 아래, 남성의 얼굴이나 제대로 봤을까 싶은데 그는 입다입다 몇 군데 구멍이 난 황내의黃內衣를 담은 봉투를 들고 다시 차에 올랐다. 혼자의 일이 아니기에, 투쟁은 적지 않은 시간이기에, 과외나 가사가 남아있는 오두막으로 그녀는 돌아왔다. 차로도 대여섯 시간, 몇 번 갈아타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전철같이 생겨먹은 비둘기호 의자에 몸을 맡겨야 했던 날. 흐린 하늘 아래에서 여전히 각개전투가 종료되지 않았던 때, 하늘은 흑黑이나 흙빛이었다.
좌판이 깔리고, 몇 명이 의자에 앉았다 일어났다. 숫자가 이렇게 쓰일 줄 알았을까, 인도나 아라비아의 사람들은. 오래된 벽에 동그라미를 그려서 영0을 만들었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갈 줄, 현인들이 알았던 것일까. 역逆성장과 임금 인하引下, 또 인원 감축減縮은 어디에나 있었고, 그것은 생의 대가가 됐다. ‘오손도손 오래오래 다같이 행복하게 살았대요’ 오래된 동화들의 위아래를 돌려서 읽어야만 했다, 이 시대에는. 숫자를 털어서 인명人命을 좌우하는 삶에서, 의자에 앉았던 사람들이 몇 마디를 뱉었다, “근로勤勞자가 불가능한 것을 원한다”거나 “노동勞動자의 삶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말.
행군이 끝나자 남성은 집에 돌아왔다. 성공 없는 전진이었지만 그 ‘나아감’이 없었다면 그 집 문앞에도 ‘변절자’나 ‘배신자’ 표시가 붙었을까. 그것은 죄일까, 노동조합에 들지 않은 죄. 아니면 분윳값을 아끼지 않은 흉凶 또는 무리에 무조건적인 동조가 없던 불편함.
구로에서는 동맹파업同盟罷業이 있었고, 청계천에서는 분신焚身이 있었으며, 그렇지만 나의 기억에는 명동의 꼭대기에서 굴뚝산업의 용사들이 기름 낀 얼굴로 외쳤던 목소리가 여전히 기억나는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오랜 연대連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