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내리면 새벽이 가까워진다 단정 지어 말할 수 있을까. 철탑과 망루 위에 올라보지 않고서 지평선이 곧다 굽다 말할 수 있을까. 내가 가본 길이라고 그게 네게 맞는 길이라 짖을 수 있을까. 오래된 질문에서 내 사랑은 시작됐다.
오래된 연인이 없던 탓은 내 잘못으로 묻어둘 일이 아니며, 내 적극성이 ‘당신(들)의 성은’까지 닿지 못한 탓도 아니며, 충분한 시간을 내지 못하거나 또 돈을 내지 못한 까닭도 아니다. 그저 그렇게 될 상황이었기 때문이리라. 굳이 운명이라는 한자를 꺼내 외나무다리에 세울 일도 아니다.
서른이 넘어서야 제대로 된 소개팅을 처음 해봤다. 억지스러울 것도 없이 대화를 잇다가 그다음이 뭔지 몰라 허우적댔다. 서너 번 만난 뒤 키스를 나눌 일은 없었고 너덧 번 만난 뒤 몸을 섞을 수도 없었다. 이런 기괴한 ‘팅 문화’가 무슨 소용인가 생각하다 이마저도 자연스러운 외계와 닿는 촉인가 흔하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으로는 그 후로 두어 번 새로운 이와 임의의 식탁에 마주했지만 더 억지스러운 진전은 없었다. 어떤 질문을 해야 당신과 지속적인 관계를 발전할 수 있는지, 그렇게 하기 위해 고민하는 게 맞는 일인지, 이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거대담론을 우겨넣은 사고가 아니더라도 당신이 나에게 어떤 관심이 있는지. 많은 경우 침묵이 허공을 메웠다. 재미있지도 활달하지도 않은 탓이 컸고, 익명의 이성에게 판단 받는다는 압박이 나를 짓눌렀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 세네 번의 소개가 마치는 밤이면 나는 소화제나 진통제를 찾다 잠에 깼다.
오래전부터 내 연인들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있었다. 동료였거나 친구이거나 팀원, 심지어 상사이기도 했다. 오래 곁에 두고 발전한 이들은 거친 법이 흔하지 않았다. 침묵도 화도 물과 같았다. 물론 이런 평온한 연애에도 한계를 긋는 내 바탕은 있었다. 함께 일할 당시에는 교제하지 않을 것, 종교를 가득 안은 이에게 그 공간을 요구하지 않을 것 또 교제했던 이의 친구는 교제하지 않을 것, 어떤 형태로든 돈을 벌어 교제 간 소요 비용을 분담할 수 있을 것. 지금 생각하면 겁이 많던 나를 위해 노력해주던 이들의 헌신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었다.
일을 오래 한 선후배 중 매력적인 사람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보통이 교제의 폭에 한계가 생겼다. 출입처가 있는 선후배, 직장인이라면 사내나 협력사, 또 가까운 이들의 가까운 사이. 그게 교집합의 한계가 됐고 그 외에 확장은 결국 ‘팅 문화’로 대변되는 우주의 새로운 꼭짓점을 만나는 방법뿐이었다. ‘저녁 있는 날’이 오면 그게 달라질 수 있을까?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내게 그 꼭짓점이 필요하단 것이다.
철탑을 오르면 해가 뜨는 것을 더 높이서 볼 수 있을까. 잠자리에 드는 해를 조금이나마 더 늦게 보내줄 수 있을까. 숨이 벅차도록 빨리 더 멀리 달리면 별이 내게 오는 속도를 줄일 수 있을까. 심약한 이들에게 이런 고민은 추위보다 치열하게 몸으로 스며온다. 오늘밤도 별이 내게 스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