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깔린 허공 가운데 전화기와 컴퓨터, 텔레비전이 있는 사무공간, 거기 앉거나 서서 이따금 뛰쳐나가면서 당직근무를 할때면 공기가 무겁다. 근신은 어려운 것, 버티다가 쪼개지거나 틀어지는 게 당간幢竿을 버티는 인생이라도 쏟아지는 소문과 소식, 주장과 판결 속에 서 있을 때면 태풍을 겨우 우산 하나로 버티는 기분이 들때가 있는다. 나는 이를 얼마나 잘 알아 쓰고 덮는가. 다시, 나는 이에 얼마큼 관심을 쏟았길래 귀를 기울일 시간을 얻는가. 풍문에 지나지 않을 이야기를 끝끝내 좇아, 그것이 공공과 어떤 연이 닿았는지 접붙임하는 것에 익명이 임의의 생각을 던지는 사이에 나는 어떤 삶으로 내 집을 짓고 있는가.
온갖 생각이 사실관계 사이에서 뒹군다. 전화벨이 울린다. 나와 송수화기 사이의 거리에 회오리가 돈다. 정돈할 시간이 필요하고, 펜과 종이, 휴대폰의 녹음기를 습관적으로 준비한다.
당신은 나에게 당신의 서사를 일러준다. 자신이 살아온 날, 오래 전 느꼈던 기자의 날선 말투, 사건이나 상황을 ‘써먹고 버린다’는 토로, 기사를 쓰는 ‘의도’, 지키고 싶은 사람과 신념, 그런 것이 술기운과 함께 전화를 통해 내 폐부를 찌른다. 그리고 알려달라는 어떤 이의 전화번호. 오랫동안 공감은 한계가 있는 대답에 멈춰 섰지만 당신은 나에게 오히려 감사에 대한 감사를 줬다.
“할 수 있는 게 있고 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알아요, 기자가. 그래도 제 말 들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앞으로, 제대로 되면 좋겠어요. 다른 기자들과 다른 그런.”
심야가 가까워져가고 내 퇴근은 벌써 길게 미뤄졌지만 그의 이야기는 이후로도 10분 넘게 이어졌다. 물론 그는 자신이 건 언론사가, 자신이 읽은 기사를 쓴 곳이 아니라는 것을 22분께가 되서야 알게 됐고 지탄은 내, 우리의 몫이 아니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우리는 모두 같은 짐을 지고 있지 않은가.
한 동료는 내 워딩을 불편해 한다. 나는 그저 전화를 받고 사람의 눈을 보며, 또 가끔 눈물이 고일 뻔 했을 뿐이다. 협잡꾼에 호사가가 되지 않도록, 오직 관성에 젖어 삶을 바라보지 않도록, 부족하지만 이렇게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외 어떤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