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벨 소리와 익명의 당신, 22분

어둠이 깔린 허공 가운데 전화기와 컴퓨터, 텔레비전이 있는 사무공간, 거기 앉거나 서서 이따금 뛰쳐나가면서 당직근무를 할때면 공기가 무겁다. 근신은 어려운 것, 버티다가 쪼개지거나 틀어지는 게 당간幢竿을 버티는 인생이라도 쏟아지는 소문과 소식, 주장과 판결 속에 서 있을 때면 태풍을 겨우 우산 하나로 버티는 기분이 들때가 있는다. 나는 이를 얼마나 잘 알아 쓰고 덮는가. 다시, 나는 이에 얼마큼 관심을 쏟았길래 귀를 기울일 시간을 얻는가. 풍문에 지나지 않을 이야기를 끝끝내 좇아, 그것이 공공과 어떤 연이 닿았는지 접붙임하는 것에 익명이 임의의 생각을 던지는 사이에 나는 어떤 삶으로 내 집을 짓고 있는가.

온갖 생각이 사실관계 사이에서 뒹군다. 전화벨이 울린다. 나와 송수화기 사이의 거리에 회오리가 돈다. 정돈할 시간이 필요하고, 펜과 종이, 휴대폰의 녹음기를 습관적으로 준비한다.

당신은 나에게 당신의 서사를 일러준다. 자신이 살아온 날, 오래 전 느꼈던 기자의 날선 말투, 사건이나 상황을 ‘써먹고 버린다’는 토로, 기사를 쓰는 ‘의도’, 지키고 싶은 사람과 신념, 그런 것이 술기운과 함께 전화를 통해 내 폐부를 찌른다. 그리고 알려달라는 어떤 이의 전화번호. 오랫동안 공감은 한계가 있는 대답에 멈춰 섰지만 당신은 나에게 오히려 감사에 대한 감사를 줬다.

“할 수 있는 게 있고 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알아요, 기자가. 그래도 제 말 들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앞으로, 제대로 되면 좋겠어요. 다른 기자들과 다른 그런.”

심야가 가까워져가고 내 퇴근은 벌써 길게 미뤄졌지만 그의 이야기는 이후로도 10분 넘게 이어졌다. 물론 그는 자신이 건 언론사가, 자신이 읽은 기사를 쓴 곳이 아니라는 것을 22분께가 되서야 알게 됐고 지탄은 내, 우리의 몫이 아니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우리는 모두 같은 짐을 지고 있지 않은가.

한 동료는 내 워딩을 불편해 한다. 나는 그저 전화를 받고 사람의 눈을 보며, 또 가끔 눈물이 고일 뻔 했을 뿐이다. 협잡꾼에 호사가가 되지 않도록, 오직 관성에 젖어 삶을 바라보지 않도록, 부족하지만 이렇게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외 어떤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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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저마다 제목을 지으며

제목짓는 것을 좋아한다. 가끔은 통신사에서 ‘씨알도 안 먹힐’ 제목을 달아서 올린다. 편집부나 데스크 선에서 훨씬 더 정갈하게 조정된다. 이의는 없다. 나보다 더 오랜 시절 기사를 썼고, 제목 한 글자 차이가 얼마큼 중요한지 이미 뼈까지 아는 선배들이다. 그래서 내가 더 치열하게 고민하게 된다. 지워지거나 글자가 조정되더라도, 빈칸 포함 스물 몇 자 안에 본질을 담고 싶은 것이다.

아주 오래 전 고건 전 총리와 관련한 기사의 제목을 기억한다. 명확하지 않으나 ‘髙, Stop’ 이거나 ‘Go, 建’ 중 하나일 것이다. 다시 H모 신문의 이 모 기자가 쓴 기사 제목이 떠오른다, ‘죽어서 보이지 않는 나는 살았을 때부터 유령이었다’. 또다른 르포르타주 명패도 있다, 다시 그 신문의 ‘환락가 한가운데서 그 시절 치부를 읽는다’.

우리는 애를 써서 글을 짓고 공간에 털고 관심을 바란다. 포장지야 어떻게 됐든 한땀한땀 고급이라 문장을 지었으나 때때로 얼굴은 그대로 두곤 했다. 화장 하거나 성형할 필요는 없으나 눈곱 정도는 떼고 머리에는 물 정도 묻혀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지 않을 테였을 때도 겁을 먹기도 했다.

사람의 시간을 먹는 직업을 살면서, 나는 적어도 앞머리 정도는 만지기로 했다. 애쓴 오늘, 나는 나에게 ‘그래도 열심히 묻고 치열하게 눌러 적은’ 정도 수식어는 붙여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