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말을 어렵게, 어려운 말을 쉽게, 자유자재로 주물러야 하는 때가 있다. 굳이 이해하기 쉬운 것을 어렵게, 미사여구같은 걸로 덮어서 글을 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진의가 아래에 있고, 그곳까지 들어가는 것에 충분한 설명이 있지 않고서는 오해를 부를 수 있다면 되도록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단어와 표현들로 그것을 지난하게 붙여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은 이른바 ‘3줄 요약’이 안된다. 1987년에 태어난 나는 그런 담백하고도 술술 읽히지 않더라도 충분히 보아 마땅한 글들이 없었다면 그전, 1987년 전의 김대중씨가 어떻게 성장해 당의 총수가 됐고, 대통령에 ‘기어이’ 됐는지, 군인 대통령의 딸로 자란 박근혜씨가 어떤 풍파를 겪고서 청와대에 앉았다가 지금 영어의 몸이 됐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시간과 사건은 하나의 선을 따라가는 듯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씨줄과 날줄이 보인다. 시대적 상황과 개별적 촉발점, 그리고 가까운 또 먼 이해관계. 그러나 대개 우리는 모두 자세히 보는 법보다는 자극의 내림차순을 설정해두고 단어와 문맥만으로 세상을 보곤한다. 사실 그게 편하다. 어떤 성폭력, 어떤 살인, 어떤 극단적 선택, 어떤 대형사기사건 또 어떤 사망. 기사 머리만 봐도 지끈대는 것을 견디는 사람과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 그러나 돌아보면 그것들은 얼마나 쉽게 바스러졌는가. 얼마나 빠르게 산화했는가.
하나의 사건을 바로 잡고서 오랜시간 질문해본 적 있다. 순환구조라는 업태상 습관이 되지는 못했던 그것은, 그러나 묻는 힘과 겸손을 배웠으나, 이해받지 못했다. 몇번을 들었다, “알겠어, 그런데”라는 말.
그는, 너는, 우리는 사실 무엇을 생각하고 원하는가. 오래전 어떤 영상을 본 적 있다. 초등학교 앞에서 팔만한 레이저 포인터로 붉은 빛을 쏘자 고개를 돌리는 펭귄들. 걔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집중했다고 생각하는 중요 문제가 사실은 어떤 트리거에 의한 것은 아닌지, 나는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