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촌에서 나고 자라서, 행복이 있지 않더라도, 삶이 있는 길에는 돈이 든다는 것을 느리게 알았다. 햇살은 바람은 물론 중고등학교 때부터 가정을 등에 짊어지고 살았던 이들에 비해서 포근한 수준이지만 어떤 날부터 부모에게 받는 돈이 어려웠다. 집이 못 살거나 어떤 충격을 받은 게 아니라, 그냥 그런 천성을 타고난 것이다. 낼 돈이 있어서 가족에 요구해서 얼마간 금전을 받을 때 수십 수백만원을 용돈으로 덧붙이면, 그걸 다시 반환하는, 그저 그런 천성.
부산에서는 삼각형으로 된 방에서 잠을 청한 적 있다. 창문을 열면 이면도로가 보이는 한칸 방, 옥상에 지어진 건물의 3개 방 중 한 칸, 주택과 벽 사이를 개조한 공간을 차지하기도 했다.
서울에 와서도 그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 얻은 방은 서울대 교류학생 당시 얻은 관악구 신림동, 정확히는 대학동의 하숙방. 가장 작은 침대를 넣기에도 부족한 공간은 오히려 학교 도서관이 더 편안하게 했고, 처음 일자리를 가졌을 때는 크지 않은 내 키보다 작은 고시원, 다음은 상가건물을 개조해 고시원 등록을 해두고 원룸 팔이를 하는, 그래서 가스레인지를 둘 수 없었던 방 한 칸.
고향에서 보낸 택배엔 생선이나 바닷바람은 없는데도 짠 냄새가 났다. 공용으로 쓰는 부엌엔 김치도 놔둘 수 없었다. 폐쇄회로를 통해 영상이 녹화되고 있는데도 라면 몇 봉지, 캔참치 몇 개를 잃어버리고 나서 난 바닷가에서 온 것들을 주먹만한 ‘고시원 냉장고’에 밀어넣었다. 오른손 약지 끝을 잘라버린 것은, 집에서 보낸 택배 상자를 뜯다가, 그때쯤이다. 그 상처가 아직도 오른손 약지에 남아있다, 지문 일부를 상실한 채로 지금까지 살아온 것.
호암湖巖의 분신에서 급여를 받으러 마포구로 넘어와서도 여전히 편안할 수 없었다. 동생과 함께 살게 된 집은 2년이 되지 않아 ‘건물을 부순다’면서 이사비를 받고 퇴거. 홍익대 입구에 얻은 집은 부산의 ‘삼각형 방’을 옆으로 세운 듯 천장이 비스듬해서 책상에 앉아있기 어려웠다. 방에 누워있으면 슬레이트 지붕 위에서 흐르는 빗물을 느낄 수 있던, 침대에 허리를 펴고 앉아있을 수 없었던, 폐지를 팔아 생을 잇던 어르신이 지하에 살았던, 서교동. 그리고 연남동.
자세히 언급하기 어렵지만, 연남동의 건물도 온전한 상태는 아니다. 어떤 구축 빌라라도 가지고 있을 태생적 한계는 물론, 아직 불거지지 않은 일조권 시비 등 굳이 문제를 만들려면 만들 수 있는 한계들이 눈에 지긋하다.
그러나 이것은 불평이나 슬픔은 아니다, 어떤 좁은 방도, 벽과 천장이 있다면 감사한 일이라서. 그저 하나씩 관찰하는 것이다. 쉽게 얻어지는 것은 없다는 것을. 고용주 아닌 프롤레타리아, 자영업과 유사하게 매문의 밥을 먹는 것이라도,의 한계를. 또 한게적 부동자산의 무게를. 재화의 힘을.
그리하여 최소한, 사실 나는 매번 68만원어치 숨이 필요했다. 고향을 떠난 값이었다. 숨을 쉬는 비용이었다. 가족도 친척도 없는 곳에서 방세와 세금, 물 값, 전기료, 땅을 파도 나오지 않는 쌀과 업무상 필요했던 커피콩값, 그리고 모양만 바꾸며 넓어지지 않는 벽.
88만원 세대를 읽고서, 세후 89만원 월급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뗄 것을 떼고 나면 20만원이 남았는데, 몸과 정신을 쓰면서 일하는 데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같다고 여겨지는 시간이 있었다. 옆자리 인턴은 90만원 가량을 ‘쓴다’ 했고, 나는 90만원으로 ‘버티’었다.
2013년 8월께, 수습기간을 포함해 발령받은 곳에서 첫 월급을 받고 나는 68만원을 떼어냈다. 어차피 없을 돈이다. 월급이 200만원이라고 하면, 사실 내 첫 월급은 132만원쯤인 셈이다. 132만원을 조금 넘는 돈을 받으면서 나는 욕을 먹었고, 혼났고, 끌려가서 협박 당했고 또 이따금 ‘남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먹었다. 68만원짜리 숨에 눈물의 값을 더하고서, 남은 것들은 잘 포장해서 이곳 저곳에 담거나 묻어뒀다.
적어도, 돈의 값과 세상의 욕심이나 한정재화가 같은 속도로 가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선거나 시위, 출장을 떠났을 때도 증시는 생물처럼 움직이며 집의 가격표도 그렇다. 생의 감각은, 살아가는 의미는 어느 것을 원하는가. 나는 때때로, 열일곱살 소년 시절처럼 글쓰기나 대단한 의미없는 사색을 밀어붙였다. 내 몸이 살찌는 것은, 다시 줄어들기 시작하지 않던 공간의 벽이 점차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했다.
어떤 종류의 환상이었다. 사실 벽은 내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매달 매문의 값이 통장에 꽂히는데, 그건 사실 밥을 먹는 값이 아니라, 통증을 견뎌낸 값이었고, 사실 몸의 것과 마음의 것이 함께 압박하는 데 대한 일종의 방어책이었다는 것을 근 10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된 셈이다.
몸에는 열꽃이 났다. 웃통을 벗으니 몸은 물론 목덜미까지 부어올랐다. 의원에선 스트레스나 외부환경 변화에 따른 것이라며 스테로이드성 연고를 권했다. 그럴 필요 없었다. 혈류가 가리키는 곳에 답이 있었고, 해소되지 아니할 고민과 두려움, 막연한 번뇌들.
왕족이 머물던 네 대문을 중심으로 번잡한 발길을 옮겼다. 역사적 저점에서 고개를 든 가격표가 돌개바람과 함께 언덕을 넘어서는 동안 엄습한 두려움에 기겁하다가, 밤이면 다시 찬 물을 부어 열꽃을 지웠다.
몇 주의, 또 어떤 고난의, 어쩌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시간을 차곡차곡 지어 올렸다. 난 그게 욕심을 채우기 위한 쌍줄 비계, 아시바, 같은 것이나 조임, 겐사끼, 라고 치부했는데 뒤돌아 보니 그저 삶이었다, 내가 부은 것, 아직 무릇 굳지 않은.
멋지지 않게 살아도 된다면서 분위기 좋은 식당과 행복했을지 모를 시간, 멋진 여행, 감동있는 공간을 뒤로 하고 나는 여기로 왔다. 주거는 정지하지만, 생의 몇 가지는 이제 시작. 사실 겨우 시작.
짧게 살다 갈 줄 알았다, 때로는. 내일은 너무 많지만 멀리서 사이렌처럼 달려오는데 그건 지금까지 채워온 ‘갚을 거리’를 위한 시간이겠지. 어떻게든 시간이 간다. 가슴 쪽으로 간다. 거칠 것을 떼고서 68만원짜리 삶을 서른 몇 개 쌓은 나는 이제 여기까지 살아왔다. 봄이 삶에 천천히 물들듯이, 여전히 청춘으로 가고 있다. 아직, 있다.
추신, 하루씩 천천히, 어제처럼, 여전히 희망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