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백송이 있었다.

서울시 종로구 재동에는 멀리서 봐도 잘 보이는 소나무 한그루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꼿꼿해 계절이 지나도 항상 푸를 것 같은 소나무는 아닌 그것은 중심가지가 양쪽으로 벌어져 마치 두 그루 같이 힘이 없어 보였다. 가지의 빛은 또 어떤가. 히멀죽한 자태는 ‘어디 아픈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런 녀석이 있는 곳은 헌법재판소, 국민의 원천이 깃든 곳이었다.

재동 백송을 처음 본 것은 지난해 겨울의 머리 정도. 이따금 북촌이나 삼청동을 거닐었지만, 굳이 헌법재판소를 갈 일 없던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국회 탄핵안 통과한 몇주 뒤 였다. 우리가 즐겨보는 가로수는 버즘나무(플라타너스), 그것은 다시 뿌리가 뽑혀 벚나무나 은행나무로 바뀌기 일쑤였다. 이처럼 자주 바뀌는 나무와 다르게 몇 수십 년은 돼 보이는 그를 처음 마주할 즈음, 나는 ‘무슨 사연이 있긴 있는 나무겠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날 그 길을 지나던 아저씨 두 명이 이야기를 나눴지, 내가 그 앞에 서서 사진을 찍으려던 무렵. 작업복 같은 것을 입고 각반을 찼던 그는 비니를 눌러쓴 동료에게 말했다. “저 나무 말이야. 저게 중국에서 들여왔어, 몰래. 아마 한말쯤 일거야. 한그루는 번개를 맞았다던가? 어쨌든 한 놈 죽고 저게 이제 우리나라 제일 오래된 백송이야. 저게 우리나라 중요한 역사는 다 쳐다보고 있었겠지”

집에 와 찾아보니 그 말은 대부분 진짜. 최소 400년에서 통상 일컬어지기를 600년 이상 산 그는 대한민국 근대사 부분부분을 전부 내려 봤을 터.

그 후로도 백여 일 동안 그를 보지 못했지만 그는 한국의 역사를 조용히 내려 보고 있었겠지.

오늘 그를 만났고 그도 나를 보고 있더라. 심판정은 물론 전국 곳곳, 전 세계 여러 곳에 동시에 울려 퍼지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 인용 소식이 그의 가지, 뿌리에도 내렸겠지.

언젠가 나 같은 기자나 카메라 감독, 혹은 스텝이나 청구인 아니면 피청구인도 저 나무를 보며 다시 느끼겠지. 인간으로, 자연 앞에 인간으로, 한 나라를 함께 살고 만들고 지내는 우리에게 ‘옳은 것’과 ‘당연한 것’ 그리고 ‘자연스러운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계절이란 게 뚜렷한 한국에서, 우리의 정치, 사법, 미래의 계절은 돌고 돌아 다시 봄을 찾아가고 있는지, 오늘 종로구는 어제보다 따뜻했다.

그곳에 백송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자연스러운 한’ 언젠가 그도 이 땅에서 없어지겠지만, 그래도 지금 이 역사를 내려다보던 푸른 백송이 당분간은 여전하길 바라본다.

 

(2017년 3월 10일 페이스북에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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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점의 오점汚點

아빠는 시를 썼다. 쌀을 못 벌었다. 그는 고구마를 심었다. 고구마 씨앗을 본 적 없으나 고구마를 반으로 잘라 땅에 묻고 두둑하게 거름을 덮으니 줄기가 솟았다. 꽃이 피었다. 고구마는 열리지 않았다. 줄기를 잡고 세게 휘두르니 땅에서 우두둑 폭죽 소리가 났다. 아빠는 다시 흙을 팠다. 거기에 고구마가 있었다.

아빠는 고구마는 시라고 했다. 쉽게 묻고 빨리 거두는 게 아니라 했다. 시간을 덮고 고민을 뿌린다 했다. 어쩌다 생각 하나가 나면, 그제야 단어들이 떠다니는 바다에 담갔다가 마음 힘줄 끊어질 듯 고통스레 건진다 했다. 아빠는 시를 썼다. 아니, 시를 심었다.

엄마는 그래도 아빠가 자랑스럽다 했다. 엄마는 가게를 했고, 엄마는 돈을 벌었다. 친구들은 내게너네 아빠 뭐해?”라고 묻지너네 엄마 뭐해?”라고 묻지 않았다. 나는 친구들이 그리 물을 때면우리 아빠는 농사를 짓고, 우리 엄마는 아빠를 지어라고 말했다.

아빠 글은 이따금 교과서에 나왔다. 또 참고서에도 나왔다. 아니, 사실 이건 어디에나 있는 단어, 글자 또 말이었지만 아빠가 묶은 단어와 문장과 단락은 선생님들의 칭찬을 들었다. 아빠를 그렇게도 사랑하는 엄마도 때로는 아빠를 타박하는데, 선생님들은 타박하는 법이 없었다. 나는 내 앞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다른 반에 가서도 그랬다고 한다. 난 잠깐 으쓱하다가 부끄러웠다. 아빠는 사실 대부분 농사를 짓다 헐레벌떡 달려와 단어를 적어두고 나가고 그랬는데. 선생님들은 다 대학도 다녀오고 공부도 많이 했는데.

시험 문제에 아빠 글이 나왔다. 마지막 문제였다. 중간에 나왔으면 다 못풀었을 거다. 아빠가 집에서 나지막이 읽어준 글이었기 때문인데, 아빠는 그 시를 한 서른 번은 읽었다.

명랑하게 건진 단어를 곱게 싸 처음 당신께~’로 시작하는 다섯줄 짜리 시는 아빠가 한번씩 엄마에게 용돈을 받을 때 읊는 시였다. 엄마는 아빠가 그 글 읊는 소리에 맞춰 오천 원짜리 한 장, 만 원짜리 한 장, 다시 만 원짜리 한 장을 아빠에게 줬다. 나는 그 곁에서 함께 춤을 추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보기에는 어디에도 엄마랑 아빠의 사랑이나 용돈, 나의 춤이나 우리집의 행복같은 말은 없었다. 남은 건 민주화 운동이나 자유, 투쟁같은 어려운 단어 뿐이었고, 나는 사실 손을 들 용기가 없었다.

눈물이 뚝뚝뚝 떨어지고, 어쩔 줄 몰라서 선생님을 따라 복도에 나간 나는 그 시간이 끝날 때까지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시험이 마치자마자 집에 달려와 아빠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아빠는 내 시험지를 보더니, 가만히 나를 안고아빠가 미안하다며 낮은 낮은 목소리로 내게 내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