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온 선거 전단을 보다가

명료한 것을, 공신력 있는 것을 좋아한다. 또 오래된 것을. 사설 단체나 사적 인증엔 항상 의문을 가지게 된다. 기분이 저어하다. 내실보다 중요도나 영향력을 가지고 다투게 되는 경우가 많을 텐데 어떤 단체가 영향력이나 목소리가 높은지에 관심 없으나 소음처럼 듣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협회나 단체 명의, 특히 그게 실체나 자금 흐름 구조를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영미권 또 중화권 이름을 빌린 곳의 증명서나 자격 같은 것이다. 횡횡하는 운동이나 경영 관련 자격증이나 대회 수상 실적도 여기 포함될 테다. 그래서, 그렇기에 무엇을 배우고자 하면 학교에 갔다. 물론 굳이 따지면 학교에 가는 편이 사설 교육이나 별도 연구보다 나름 저렴한 것도 작용했다. 그래서, 또 그리하여 나는 학회나 공공기관 및 단체의 행사를 ‘그나마’ 신뢰하고 있다. 물론 어쭙잖은 실력으로 학벌주의 같은 것을 신봉한다는 말도 아니다.

좀 다른 이야기. 촌에서 태어났고 공부도 지방에서 시작했다. 대학교 입학하고 집에서 최소한의 지원만 받기위해 서빙했고 벽돌도 날랐으며 옷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이런 것은 (앞서 말한 공적인) 학교나 국세청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열심히 또 잘 살기 위해 노력했다. 돈이나 경력, 직업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스스로 밥을 벌어먹으며 모든 남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조금 더 나아가 정의나 공정같은 걸 입에 올려도 되는가, 같은 이야기다.

절벽 틈을 붙잡고 버티고 또 올라가는 느낌이 오래 전부터 있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의 한 의류매장에서 일할 때는 ‘이 사이즈부터 저 사이즈까지 다 사겠다’는 말을 들으며 부러움과 좌절을 한번에 느꼈다. 마포구 공덕동 5㎡ 고시원에서 무상으로 제공했던 유통기한 임박한 라면에 묵은쌀로 지은 밥을 먹었으면서는 공덕역 앞 순대국 전문점에서 순댓국에 밥 한공기 추가해서 먹었으면 하는 비루한 소원을 가지기도 했다, 그 7000원이 아까워서. 2013년 겨울 일을 가지게 된 뒤 그렇게 먹고는 한참 기분 좋았던 기억도 있다, 펑펑 울 줄 알았지만.

석사 때는 경기 의정부에서 퇴근해 중고 이륜차를 타고가서 수업을 들었다. 사실 그정도는 온라인 사설 교육기관같은 곳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그것보다는 학교를 신뢰했다. 정문에서 빌링슬리관까지만 해도 족히 1㎞, 동문에선 오르막길만 700~800m라 그게 필요했다. 정장에 비를 맞으며 운전해 수업을 듣거나 도로 굽은 구간에서 넘어지며 찢어진 바지를 입고 시험을 보기도 했다. 각자의 추억이 있겠지만 그렇게 한칸씩 채웠다, 가진 유일한 재능이 끈질긴 노력인 것처럼.

그리하여 또 그밖의 삶을 돌아보아도 거리낄 게 없고 부끄러운 게 없다. 아니, 사실 조금 있다. 반짝반짝한 청춘에게 뽐낼만한 거창한 데이트를 선물하지 못한 안타까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 행복한 그들을 마음 속으로만 응원하기로 했다. 그걸 제외하면 대외적으로는 떳떳하지 못할 만한 게 없을 테다.

선거에 나선 이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지역구에 나선 어떤 이는 학사도 석사도 가린 채 출신 고등학교와 박사 수료만 적어두었다. 어떤 사람은 중범죄에 대한 변명이나 사죄도 늘어놓지 않았다. 상식이나 공정, 정의를 인쇄한 또다른 자의 20대쯤으로 추정되는 자녀는 내가 평생 벌어도 모을 수 있을까 말까 하는 돈을 이미 소유했다. 그가 오롯이 가진 능력으로 벌어들인 것이길 바란다. 아닐 것이란 의심은 일단 뒤에 두겠다. 아무리 최소 노력으로 최대 뽐냄을 창출하는 게 자기 광고·홍보이며 그 또한 능력이라 할지라도 그가 만질 돈이 내 돈이고 그가 할 결정이 내 결정의 대의라면 나는 그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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