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산이 없지만 이 비가

서울을 향하는 고속도로에 비가 내린다. 장천마을에서 맞은 몇 방울이 아니라 그래도 땅을 적실만큼, 부족하진 않게 넉넉히 내린다.

길고긴 한주를 마치기 위해 집으로, 세번째 고향같은 연남동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땀에 젖은, 사흘째 입은 옷과 먼지투성이가 돼버린 가방을, 보조배터리와 충전기, 수첩과 수건, 텀블러가 대충 들어차 있는 배낭이 복잡고단한 날을 반증한다.

지난 주말 추위 속에서 핀 벚꽃을 마주한 사람들을 만나고 묻고 썼다. 그치들이 그랬다. “다음주부터 본격적으로 서울에 꽃이 핀다는데, 그 사이에 바람이 많이 불거나 비가 와서 다 지면 어떻게 하냐”고, “그래서 굳이 이번주에 왔다”고.

그들 역시 이 비는 반가울 것이다. 먼저 얻은 사진 때문이 아니라 땅 속에서 숨쉬고 있을지 모르는 잔불을 이 비가 깨끗하게 안아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리라고, 나는 믿는다.

과하지 않게 다가가 조심히 묻고, 뒤로는 열심히 찾아대면서 버티려고 한다. 지난 목요일에는 14년 만에 가위에 눌렸다. 피곤하면 때때로 왼쪽 눈이 뿌옇다. 부단히 읽고 심각하게 고민해도 누군가는 그를 쉽게 욕하고 손쉽게 몰아붙이곤 하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고개 숙이고 낮게 가겠다.

집에 가는 길, 나는 우산이 없지만 이 비가 좀더 거세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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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숙소의 밤은

이 숙소의 밤은 퍽 아름답다. ‘내 고향 여수 바다만 못하다’고 억지를 끼워 자랑하고 싶을만큼, 좋은 밤 불빛은 창을 가득 채운다. 그러나 저런, 유혹하는 네온과 오징어잡이 배의 집어등이 아닌 불이 오늘 우리와 모두를 미치게 만들었다.

꽤 좋은 버스를 타고 좋은 바다 마을을 왔다. 여름 휴가가 아니라도 정취있는 고장은 항상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그러나 이번 마음은 반대쪽으로 지침을 돌린다. 시외버스의 문이 열리자 탄내가 가득했다. 미세먼지 한점 없는 하늘에 불길의 흔적이 푸르게도 남았다.

어젯밤은 2시께까지 잠을 들지 못했다. ‘아무리 빠른 바람도 불이 시·도를 그렇게 넘을 수 있을까’ 겪어보지 못한 어린 사람은 한참 자료를 찾아보다가 2000년, 앞서서 1996년에도 비슷한 화마를 찾았다. 먼발치서 걱정을 하다 잠든 나는 아침 출근길 전화 한통에 결초보은의 고장을 걷고 묻고 적으며 하루를 보냈다. 무척 조심스러웠다, 진정 무척이나.

고속도로에서 만난 붉은 용사들의 행렬, 빗자루를 들고 옆집을 쓸어주는 아저씨, 목마를 테니 물이라도 더 마시라는 병원 직원에 지나가는 사람들 걱정에 여념 없는 목사까지.

오래전 삼풍이 무너진 날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방송에서 유난히 반복했던 것은 내 무의식 아니면 훗날 다시 접한 자료화면은 잔상처럼 흔들렸다. 그 언저리에 끝의 끝까지 남았던 것은 그 와중의 도둑, 사기꾼 그런 사람들.

수천 수만번 흔들리면서 나는 지금 나로 여기까지 왔다. 그렇지만 오늘의 사람은 그때와 달랐다.

자연은, 인간이 만든 기계에서 불이 났으나, ‘스스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인간은 ‘스스로 자라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슬픔이 크고 고통은 가시는데 오래될 것이다. 그러나, 섣부른 말이지만 사람들이 도시를 밝히고 있다. 이 도시는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