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보] 사진기를 받으면서

 

 

아빠는 예술혼이 넘치는 사내였다. 취업하고서, 결혼생활을 시작하고서도 사진기를 놓지 않았다. 피사체는 자연이나 사람에게서 가족으로 변했어도 오래된 네거티브 필름과 인화물을 살펴보면 그 실력은 시대 이상을 품고 있다. 노동부 장관배 노동자 사진대회던가, 오래된 앨범 속에 수상자 이름에는 뿔테를 쓴 아빠가 흑백으로 남아있다.

피는 돌고 도는 게 맞는가보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가, 세뱃돈을 몽땅 털어서 코닥 이지쉐어 디지털 카메라를 샀다, 내 첫 카메라. 80만화소, 100만화소, 200만화소 수준인 그것을 한참동안 쓰다가 결국 망가뜨리고서 장롱, 안방 장롱에서 일본 니콘사에서 만든 FM2를 발견했다. 첫 수동 사진기였다.

대학에 들어가서 곧바로 찾은 게 사진부였다. 사진예술연구회라는 이름은 지금 생각하면 너무 거창했으나 그때 배운 가락으로 부장까지 하고, 연이어 청춘을 바친 부대신문에서는 문화부에 이어 사진 전임기자도 지냈다.

그 전후로 나는 사진기 춘추전국의 시기를 보냈다. 감성에 호소하는 로모사의 LC-A부터 당시 고급기에 속하던 니콘사 D1x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캐논사, 소니사, 삼성사의 DSLR, 오래된 명작인 라이카사 M3과 콘탁스, 보잌틀란더를 위시한 RF, 핫셀블라드의 아류인 젠자 브로니카, 롤라이플렉스 등 중형 사진기까지. 당시 중고거래 기록은 끝도 없는 페이지로 대변된다.

어느날은 그런 생각도 한참이나 했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흑백으로만 보였으면 하는 그런. 머릿속에는 이미 조리갯값과 셔터속도가 팽이처럼 종일 돌아가고 있었다. 흑백필름 현상과 암실의 닷징, 버닝, 엘리드와 일포드.

여전히 사진과 영상을 사랑하지만, 결이 다른 이야기를 쓰던 나에게 오늘 누군가 당신이 내게 카메라를 쥐여줬다. 누군가였다면 ‘이것 업무 더 시키는 것 아니냐’는 푸념을 늘어놓을 수도 있을 테지만 나는 그저 고맙고 또 반갑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고팠던 인정을 오늘 나는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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